[빈고책읽기] 마이클 하트, <공통적인 것과 코뮤니즘>,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읽을거리

2018년 6월 14일 두번째 책읽기 모임이 서대문 평화살롱 레드북스에서 열렸습니다. 

서원, 소연, 충구, 상혁, 디디, 지음, 유선 7명이 모여서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을 함께 읽었습니다. 

3장 <공통적인 것, 보편성, 코뮤니즘에 대하여 – 에티엔 발리바르와 안토니오 네그리 대담>을 보다가

네그리와 발리바르에 대한 다른 자료를 좀 보고 다시 보는 걸로 하고, 

1장  <공통적인 것과 코뮤니즘>을 읽으며 얘기 나눴습니다. 

다음주 3회차 모임에서 한 번 더 보기로 했습니다. 

2장, 7장, 9장 중에 하나 또는 둘을 함께 읽을 예정이니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빈고 책읽기 3회차 모임

– 시간 : 2018.06.21 목요일 7:30

– 장소 : 책방이음(종로구 대학로14길 12-1 혜화동)

– 문의 : 빈고폰 010-3058-1968

– 모임 소개 : 2018 공동체은행 빈고 책읽기모임에 놀러오세요.

아래에 같이 읽은 부분 발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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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시대의 투쟁이 (토지 같은) 부동산과 (물질적 상품 같은) 동산 사이에서 벌어졌다면, 오늘날의 투쟁은 물질적 소유형태와 비물질적 소유형태 사이에서 벌어진다. 다시 말해서 맑스는 소유물의 유동성에 집중한 반면에 오늘날의 핵심적인 쟁점은 희소성과 복제 가능성이며, 따라서 투쟁은 배타적 소유물과 공유될 수 있는 소유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이디어, 이미지, 지식, 코드, 언어, 그리고 심지어는 정동조차 소유물로서 사유화될 수 있고 통제될 수 있지만 이것들은 너무 쉽게 공유되거나 복제되기 때문에 그것들의 소유권 침해를 규제하기가 더 어렵게 된다. 소유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족쇄가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자본에 내재한 모순이 드러난다. 공통적인 것에 울타리를 쳐서 소유물로 만들수록 그것의 생산성은 저하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의 확대는 소유관계 일반의 토대를 침식한다.

가령 종자를 천연 살충제로 사용하는 전통적 지식이나 약용식물에 대한 전통적 지식이 그것에 대해 특허권을 획득한 기업의 사적 소유가 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그런 행동을 해적질로 일컫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해적은 훨씬 더 고결한 소명을 갖고 있다. 그들은 소유물을 훔친다. 반면 이 기업들은 공통적인 것을 훔치고 소유물로 변형시킨다.

일반적으로 자본은 사유화 자체가 아니라 지대의 형태를 통해 공통적인 것을 수탈한다. 오늘날 인지자본주의를 연구하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경제학자들(가장 두드러지게는 카를로 베르첼로네)은 과거에 자본주의적 수탈의 지배적 양식이 지대에서 이윤으로 이행하는 경향이 있었듯 오늘날에는 이윤에서 지대로 이행하는 반대 방향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  이윤에서 지대로의 이행이 일반적인 추세가 되고 있으며 이에 상응해 자본이 공통적인 것의 생산 외부에 머무르게 된 오늘날의 맥락 속에서 금융을 시유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금융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공통적인 것을 수탈하며 통제를 행사한다.

코뮤니즘은사적 소유의 지양일 뿐만아니라 소유자체의 지양이다. “사적 소유가 우리를 너무나 우둔하고 너무나 일면적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한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 함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를 소유물이 아닌 것으로 여긴디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사적 소유는 우리를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여기서 맑스는 공통적인 것을 찾고 있다. 공통적인 것의 사용을 특징짓는 자유로운 접근과 공유는 소유관계 외부에 있으며 그것과 대립한다. 우리는 너무나 우둔해져서 세계를 사적인 것 아니면 공적인 것으로밖에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보지 못하게 됐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생겨난 자본주의적 전유양식, 즉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개인적 사적 소유의 첫번째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과정의 필연성에 따라 자기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이 부정의 부정은 사적 소유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 – 즉 협력과 토지 및 (노동자체를 통해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를 확립한다.” 

“코뮤니즘은 인간자신의 소외인 사적 소유의 적극적인 지양이며, 따라서 인간에 의한 그리고 인간을 위한 인간 본질의 진정한 전유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즉 인간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으로의 완전한 회복이다.”

맑스는 이런 코뮤니즘적 전유, 비소유적 전유를 인간적 감각과 전면화된 창조적 ·생산적 능력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전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전면적인 본질을 전유”하는데, 맑스는 이를 “인간이 세계와 맺는 모든 인간적 관계,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직관하고, 지각하고, 원하고, 행동하고, 사랑하기”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사적 소유의 적극적인 지양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인간은 인간을, 즉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생산한다” 

사적 소유의 지양에 조응하는 코뮤니즘의 적극적 내용은 인간에 의한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 인간에 의한 인간성의 생산, 즉 새로운 보기, 새로운 듣기, 새로운 생각하기, 새로운 사랑하기이다.

두뇌와 마음이 행하는 노동의 변별적 특징 중 하나는 역설적 이게도 생산의 객체가 실제로는 주체라는 점이다. 즉 이런 노동에서는 예컨대 사회적 관계나 삶형태 동에 의해 규정되는 주체가 생산의 객체가 된다. 이런 사실은 적어도 오늘날의 생산형태를 삶정치적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해준다. 오늘날 생산되는 것은 바로 삶형태들이기 때문이다. … 삶정치적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냉장고와 자동차의 생산은, 냉장고 주위에 핵가족의 노동· 젠더 관계를 만들어내거나 각자의 자동차 안에 고립된 채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개인들의 대중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중간 지점일 뿐이다.

코뮤니즘은 소유의 지양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공통적인 것의 긍정에 의해서, 즉 열려 있고 자율적인 삶정치적 생산의 긍정과 자치적이고 연속적인 새로운 인간성의 창조에 의해서 규정된다. 매우 큰 틀에서 보면 코뮤니즘에 있어 공통적인 것은 자본주의에서 사적 소유가 가지는 의미,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국가 소유가 가지는 의미와 같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이익과 손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멈추고 그 대신 공통적인 것의 몫을 나누는 데 관심을 가지는 바로 그때 정치는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랑시에르의 관념에 따르면 공통적인 것은 파르타주(partage), 즉 분할, 분배, 공유의 과정이 일어니는 중심적이며 아마도 유일한 지형이다. 랑시에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공통적인 것이 활동하는 장, 그리하여 끊엄없이 계쟁 (係爭)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장이며, 그것들을 다 합쳐도 결코 전체와 같을 수 없는 분파들, 자격부여들, 권리들일 따름인 몫들 사이의 관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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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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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연

    서문을 안 읽었죠 아마? 하지만 아마도 돌아올 일이 없을 듯 하여, 이 부분도 보충해주시면 좋겠네용 😀

    공적인 것이 실행하는 정치는 모두의 문제를 대신해서 관리하는 집단을 필연적으로 전제하고 이 집단은 필연적으로 권력 집단이 되기 때문에, 공적인 것의 정치에서는 경코 모든 사람이 통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 오직 형식적 민주주의만, 민주주의의 탈을 쓴 비민주주의만 가능하다. 모두의 협동적·직접적 참여를 원리로 하는 공통적인 것만이 진정한 민주주의, 절대적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다.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 연구공간 L,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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