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 김기덕 '빈집'과 해방촌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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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사회적경제리뷰>에서 김기덕의 영화 ‘빈집’ 영화평을 빈집과 연결해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이미 공유한 줄 알고 있었는데… 깜빡하고 있었네요. 

영화평이라기 보다는 그냥 빈집 얘기입니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ㅎ

언제 같이 영화 보고 얘기하면 좋을 거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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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 김기덕 ‘빈집’과 해방촌 ‘빈집’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집’에는 유령같은 한 남자(태석)가 나온다. 그는 고급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주인들이 자리를 비운 빈집에 능숙하게 문을 따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그저 들어가서 살고 나온다. 밥하고 빨래하고 물건을 고친다. 그러한 행동은 그 집의 주인으로 봐도 이상할 것이 없다. 처음 문을 따는 장면과 돌아온 집식구들과 마주하는 장면만 없다면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꼭 빈집만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집에서 죽은 듯이 살고 있는 선화의 집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선화와 함께 다닐 때 두 사람은 독거 노인이 죽어있는 집에도 들어가서 염을 하고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이런 실수는 그가 열쇠 구멍에 전단지를 붙여놓고 며칠 후에도 그대로 붙어 있으면 빈집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들고나는 사람이 없으면 빈집이다.

그는 집이 없다. 하지만 집을 구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는 아니다. 그가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를 중고로 팔아도 웬만한 월세 보증금은 충분히 될 것이고, 고시원이라면 몇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거처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기 때문에 빈집을 전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집을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을지 모르겠지만, 대신 그는 빈집에 들어가는 능력(문 따기)이 있고, 빈집에서 살 수 있는 능력(요리와 빨래)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오토바이)이 있다. 그는 집을 구입해서 사는 삶 대신, 빈집을 떠도는 삶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가진 것이 없다. 그는 오토바이와 입고 있는 옷과 문 따는 도구 말고는 갖고 있는 것이 없다. (물론 그의 은행계좌는 확인해 보지 않아 모르겠다.) 하지만 딱히 가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집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는 들어간 집에서 아무것도 갖고 나오지 않는다. 더 필요한 것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도둑이 아니기 때문에 갖고 나오지 않고, 갖고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가진 것이 없다. 그는 무언가를 파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집을 가꾸고 화분에 물을 주고 묵은 빨래를 하고 망가진 것을 수리한다. 집이라는 공간과 집에 있는 물건들을 활용해서 잘 살고 나올 뿐, 그것들을 자신의 소유로 취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의 삶은 왠지 여유로워 보인다. 이런 유령같은 인물로 인해서 이 영화는 온통 집과 삶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로 가득찬다.

선화의 남편(민규)은 저택같은 집을 소유하고 있다. 집 안에는 그가 소유한 고가의 물건들이 있고, 아마도 모델이나 배우였을 아름다운 아내 선화도 있다. 민규 자신이 선화에게 하는 말대로 ‘이 정도 살기가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 보기에도 연민과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그가 정녕 이 집의 주인일까? 그는 사업상의 이유로 출장을 자주 가고 집을 자주 비운다. 집을 소유하기 위해 집을 비운다. 아내를 집 안에 사실상 가두고 폭행하하기도 하지만, 그런 아내에게 소리 친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 왜 날 무시해? 내가 니 노예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모순되고 가증스러운 발언이지만, 어찌보면 나름의 진실성이 있다. 그는 자신의 노예인 아내의 노예다. 그는 아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 무시당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무력한 인간이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돈이 많다는 점 뿐이다. 그는 많은 것을 구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주인은 아니다.

선화는 물론 이 집의 안주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집에서 자주 클로즈업되는 액자 속의 사진이나 골프 연습 그물 뒤의 조각상과 같은 존재다. 화려한 과거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남편에게 매맞고 강간당하면서도 저항하거나 뛰쳐나가지 못하는 남편의 소유물에 하나일 뿐이다. 외부인을 막기 위해 문단속을 하고 있지만, 스스로 나가지도 않기 때문에 사실상 남편이 가두고 있거나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사실상 생명력을 잃고 죽어 있다. 그래서 그녀가 집 안에 있지만, 태석은 이 집을 빈집으로 인식하고 들어온다. 그녀는 성공한 모델이 되기 위해 애썼을 것이고, 마침내 부자와 결혼함으로써 이 저택의 소유자가 됐지만, 그녀 역시 이 집의 주인은 아니다.

사실 집이 순수한 소비의 장이 된 이상, ‘도둑’이 아닌 행위를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든 행위가 소비고 파괴다. 그건 ‘주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합법적으로 돈을 지불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지불하지 않는 소비는 도둑이거나 착취일 뿐이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온갖 고장난 가전제품을 고치는 것, 그리고 빨래를 그것도 손으로 하는 것이 비주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재생산(소비가 아닌) 행위다. 사실 더 중요하게는 청소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태석이 들어가는 빈집들은 모두 대체로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한 듯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특별히 청소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과연 현실의 얼마나 많은 집들이 그러할까? 사실 집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 아무도 오지 않고 또 올 수 없는 집에 산다는 것은, 현실적에서는 무엇보다도 집을 지저분하게 망가뜨려도 집이 비어진 채로 방치되어도 무방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이 집은 주인 없는 빈집이다. 여기에 태석이 문을 따고 들어온다. 태석은 이 집에서 요리하고 밥먹고 목욕하고 손빨래(선화의 옷까지)하고 화분에 물주고 골프연습하고 저울을 고치고 선화의 사진작품집을 감상하고 다림질하고 가족사진(원래의 가족 사진을 배경으로 자신을 포함한 사진)을 찍는다. 선화는 이 과정을 뒤에서 줄곧 뒤쫓는데 여기서 주인과 손님은 완전히 전도된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몰래 주인의 행동을 엿보는 사람은 오히려 선화다. 태석은 이 집과 집의 물건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능숙하게 사용하고 가꾼다. 태석은 선화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그녀가 자신을 따르게 한다. 그는 낯선 손님(혹은 침입자)으로 왔지만 사실상의 주인이다. 선화는 처음부터 이 낯선 손님의 침입을 별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하긴 이 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집의 합법적인 소유자로서 자신을 폭행하고 강간하는 남편일텐데 누가 들어온들 두렵겠는가?) 선화는 이 손님의 주인행세를 그냥 내버려두고 뒤에서 엿본다. 선화는 이 집의 안주인으로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주인=노예이기를 벗어나는 것, 탈출하는 것을 갈망했던 것이다. 손님의 주인되기, 주인의 손님되기.

태석과 선화가 들어갔던 다른 집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다. 나중에 들어오는 집 주인들은 먼저 빈집에 살고 있었던 태석과 선화에게는 오히려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침입자들에 가깝다. 집의 물건을 고치고 빨래를 하고 가족 사진 찍고 화분을 가꾸면서 (먹을 것은 좀 먹지만)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다짜고짜 펀치를 날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준 이들을 살해자로 몰아 경찰에 넘긴다. 

단 한 곳 예외가 있다면 선화와 태석이 첫 섹스를 한 한옥집이다. 태석이 감옥에 간 후 선화는 혼자 이 집에 다시 온다. 대문은 그냥 열려 있다. 불쑥 들어온 선화는 집주인 남자와 잠시 눈빛을 교환하고는 그냥 들어가 태석과 함께 앉았던 소파에 누워 잠을 잔다. 집주인 부부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내버려둔다. 어이없지만 재밌다는 눈치다. 두 부부는 함께 집안을 가꾸고 청소하는데 이런 모습은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또 이 집의 남편은 자기 집에 몰래(!) 들어와서 아내를 놀래키기도 하는데, 이 침입(!)과 놀람은 둘의 유쾌한 놀이이다. 잠에서 깬 선화는 집을 나서며 부부에게 인사한다. 이 두 부부는 또한 선화와 태석에게 인사받는 유일한 집 주인들이다.

영화와 같은 이름의 해방촌 ‘빈집’은 아주 단순한 설정으로 시작했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상업적인 게스트하우스(guesthouse)가 아니라 손님들이 주인이 되는 손님들의 집 게스츠하우스(guests’ house). 영화처럼 단지 흥미로운 설정에 불과할 수도 있는 빈집은 현재 4년반을 지속하며 수 백명의 주인들이 오고가고 함께 살면서 다섯 채의 집과 가게와 마을금고로 확장되면서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되묻고 있다. ‘빈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빈집’이란 무엇인가? 영화 속의 이 질문이 현실로 올라온 셈이다. 빈집의 승욱은 손님(guest)로 와서 주인(host)가 되는 주인이자 손님인 우리의 존재를 유령(ghost)으로 설명한 바 있다. 고스트하우스(ghosthouse) 빈집.

여기서 해방촌 빈집은 영화 빈집과 또 한 번 겹쳐진다. 태석은 감금과 수련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진정한 유령이 된다. 그는 그를 볼 수 있는 능력과 애정이 있는 자, 선화에게만 보인다. 유령을 맞이함으로써 선화는 생명력을 되찾고, 집은 살만한 곳이 된다. 해방촌 빈집의 유령은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집 안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다. 이 집을 만들고 가꾸고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수많은 존재들이. 나는 모르지만 누군가가 이 집을 만들었고, 구매했고, 전월세계약을 했고, 보증금을 댔고, 월세를 내고, 가구를 들였고, 설비가 고쳐져 있고, 항상 청소가 되어 있고, 세탁된 옷이 있고, 밥이 되어 있고, 설거지가 되어 있다. 왠지 이상하게 이 집에는 편안함과 화목함과 웃음과 애정이 있다.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유령들! 특별히 존재 를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 무언가를 남겨주는 유령들! 유령들로 인해 나의 삶이 가능해진다. 보이지 않는 노동과 보이지 않는 사랑 이것을 깨닫는 과정, 그것이 또한 우리가 유령이 되는 과정일 것이다. 물론 유령들도 성을 내고 심술도 부리지만 그것 또한 삶의 수련 과정이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즐거운 일이다.

빈집은 특별한 집인가? 영화 빈집의 메시지는 모든 집은 빈집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 집의 주인인가? 당신 삶의 주인인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 집은 빈집이다. 당신이 돈을 냈다는 것은 지극히 빈약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당신의 집과 식구와 물건과 유령들과 당신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해방촌 빈집의 메시지는 모든 집은 빈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모두가 동등한 주인이 되어 서로 오가며 환대하며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자는 것, 반대로 말하자면  교통하는 자, 환대하는 자, 공유하는 자가 진정한 집의 주인이고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것, 이것이 그다지 특별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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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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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고 영화 ‘빈집’이 더 보고 싶어지네… "그것 또한 삶의 수련 과정이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즐거운 일이다"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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