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호 갈등중재위원회의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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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호 갈등중재위원회의 판단


  1. 이 사건을 맞이하는자세 

    1. 우리 중재위원들은 빈고의 구성원이 지속적으로 호소하는 고통을 더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였습니다. 비록 신청인이 호소하는 부당함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빈고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최소한 지금, 여기,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의 고통에는 응답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 신청인이 중재위에 요청한 사항 또한 그간의 있었던 모든 억울함과 부당함을 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피신청인과의 대화가 신청인의 기억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책위의 입장문에 서술된 경위에 대해 피신청인의 과오가 있었다면 사과를, 그게 아니라면 정확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3.  본 중재위는 신청인의 요구가 우리 공동체가 해결 가능한 범주라고 판단하였고, 중재위가 신청인과 피신청인이 소통할 수 있는 매개가 되어 서로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신뢰와 이해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4. 피신청인은 빈고 10기 운영회의의 입장문 이후로 침묵했고, 11기 운영회의가 구성된 이후 11기 운영회의의 질문에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11기 운영회의는 이것이 11기 운영회의의 중립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보고,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갈등중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중재위의 제안에도 피신청인의 침묵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침묵의 시간만큼 중재가 결렬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은 짙어졌지만 그럼에도 공지한 대로 임의의 중재자를 선임해 이 과정을 완주하기로 결정한 것은 신청인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이 부정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 중재위가 짐작한 피신청인의 입장

    1. 본 중재위는 이 절차에 응답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 또한 피신청인의 의사표현이라 생각하며, 부족하나마 피신청인의 마음과 의도를 헤아려보고 싶었습니다.

    2. 폭언을 했다는 누명이 억울한 신청인이 유일한 증인인 피신청인에게 해명을 요청했음에도 피신청인이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의도를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했습니다. 신청인이 폭언을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신청인이 대책위 측에 한 진술 경위를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혹은 빈고에서 이 사안을 공식적으로 다루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피신청인이 신청인에게 답한 개인 메일의 내용 등을 통해 피신청인은 ‘상영회’ 자리에서 A씨가 호소한 고통에 연대하는 것 그리고 피신청인이 속한 평창올림픽반대연대의 입장에 신의를 지키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해석 또한 피신청인이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 한 그저 짐작에 불과할 것입니다. 


  1. 중재위가 이해한 신청인의 입장 

    1. 자신이 공개적으로 가해자라고 지목받은 것, 왜 자신이 그렇게 지목받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던 것, 상대에게 설명을 요청했지만 수개월 째 응답받지 못한 것,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일방적 규정이 인터넷 상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 도움을 요청했던 공동체에서 엇갈린 판단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혹은 공동체 내의 책임있는 기구가 몇 달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적절한 지지를 받지 못한 것, 무엇보다 자신이 그토록 반대하고 거부하던 강간문화의 가담자로서, ‘내가 아닌 나’가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당사자로서 겪었을 무기력, 고립감, 불필요한 고통에 본 중재위는 주목했습니다. 

    2. 예상 밖의 사건을 만나 고통받을 때 그 경험을 자신에게 납득가능한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이 때 ‘이해’라는 것은 자신을 책망하는 방식이든 타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이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스스로 구성하는 과정입니다. 신청인이 요청한 것은 자신의 서사 내용 자체에 대한 인정이나 동의 이전에 자기 서사를 구성, 편집하는 과정에서의 자율성에 대한 존중과 협조라고 봤습니다. 신청인이 구성하고자 하는 자기 서사의 편집권을 부정당하지 않는 것, 즉 ‘상영회’에서의 장면과 ‘대책위’ 문건의 작성 경위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과정에 피신청인의 설명을 줄기차게 요청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3. 그러나, 피신청인으로부터 사과 혹은 사과 이전에 지난 일들에 대한 설명(해명)을 듣고 자신이 겪어온 지난 시간을 이해하고자 했던 신청인의 간절한 호소마저 피신청인의 무대응으로 거부된 지금, 본 중재위는 그에 대해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4. 신뢰하는 공동체에서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활동한다는 것의 의미, 활동하는 공간에서 안전함을 경험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본 사건을 빈고 공동체에서 해결을 요청한 신청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신청인의 고통이 연장되는 것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되고자 아래와 같은 판단과 제안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 판단

    1. 피신청인이 본 중재위 절차에 응답하지 않았고, 양 당사자의 동의와 합의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중재’는 성립될 수 없으며, 중재 불성립의 귀책 사유는 피신청인에게 있음을 확인합니다.

      1. 신청인은 이 상황을 양자의 ‘의견차이’ 혹은 ‘갈등’으로 명명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본 중재위는 문제 해결을 위해 최대한 양측의 입장을 듣고 치유와 화해의 국면으로 전환하고자 하였으나, 피신청인이 참여 요청을 거절하였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은 부당한 ‘폭력’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2. 피신청인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해해보고자 하였으나 그와 별개로 본 중재위 판단에는 이 절차에 응하지 않은 피신청인의 결정이 중요했음을 밝힙니다.

      3. 본 중재위에서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사건의 발단이 된 장면에 대한 실체적 판단이 아니라, 왜  자신이 ‘강간문화의 가담자’로 지목된 것인지 설명을 듣고자 하는 신청인의 요청 그 자체였고 결국 응답을 회피한 피신청인의 행동은 더 이상 ‘중재’의 대상이 아니라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부정의한 행동이라고 봤습니다.

      4. 신청인이 피신청인의 설명/해명을 요구한 것은 신청인 입장에서 신뢰할 수 있고 안전하다고 여긴 빈고 공동체에서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도 들릴 수 있기를 원한 것이며, 받아들이기 힘든 지금까지의 이 상황 자체를 어떻게든 이해해보고자 하는 신청인의 절박한 요청이라 여겨집니다. 이 때 변명이든 해명이든 응답 자체를 거절한 피신청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신청인이 호소한 고통을 가중시킨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5. 만약 피신청인이 신청인의 요청에 동의할 수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표명하는 방식으로 중재위에 참여하는 것이 공동체 성원으로 기대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무응답으로 일관한 것은 신청인 뿐 아니라 이 공동체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함의를 지닌 선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2. 신청인의 가해가 지목된 장면에 대한 실체적 판단이 불가하단 이유로 혹은 그 판단 불가를 근거로 신청인과 피신청인 사이에 ‘중립’을 지켰을 때 지속된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신청인이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신청인의 고통이 중단될 수 있으려면 신청인의 명예를 회복하는 조치가 필요하며, 이 사건의 경우 피신청인의 어떠한 설명이나 해명이 없는 상황에서 본인이 부당하게 가해자로 지목됐다는 점을 이해받고자 하는 신청인의 입장을 외면할 합리적 이유는 없다고 본 중재위는 판단했습니다.

      1. 자신을 가해자로 지목한 ‘대책위’의 문서에 동의하지 않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피신청인과의 대화를 요청했지만 응답받지 못한 채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인터넷에 규정되어 공개되어 있을 때,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실제로 이 사건의 영향으로 다른 인간 관계에서 배제되는 과정 속에 신청인은 총체적 고통과 피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2. 지난 수개월 신청인이 겪었을 좌절스러움에 대해 깊이 공감합니다. 신청인의 훼손된 명예와 활동가로서의 존엄, 신청인이 경험했을 신뢰의 상실에 대해 연결된 존재로서 공동체 성원들이 갖는 책임이 있으며, 본 중재위의 판단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신청인의 고통을 치유하고 회복해 나가는 데 일말의 위로와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권고 및 제안

    1. 신청인에게

      1.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 내가 말한 것처럼 남에 의해 규정되고 공개됐을 때 그것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에서 기인하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해결하고자 자신을 그렇게 규정한 과정에 개입되어 있는 이들에게 설명을 요청했지만 응답받지 못했던 2차적 고통, 상대와 공동으로 엮여있는 빈고 공동체에 개입과 해결을 요청했지만 반 년 이상 어떠한 답도 듣지 못했을 때의 좌절감과 무력감에 공감과 위로를 전합니다.

      2. 지난 수개월 응답받지 못한 ‘지연된 정의’가 존재했음을 공동체 차원에서 인정하고 뒤늦게나마 책임을 지고자 하는 일환으로 본 중재위의 판단을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3. 이번 중재위의 판단을 통해 빈고 그리고 신청인이 속한 공간에서 활동을 해나가는 데 안전한 발판이 될 수 있기를 조심스레 희망합니다. 신청인의 삶은 누군가에 의해 함부로 규정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신청인의 존엄이 훼손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중재위는 신청인이 “강간문화의 가담자”라는 규정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신청인이 그동안 다른 이들의 판단 속에서 고통을 받았다면, 이제는 그들의 판단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으로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고 회복해 가길 바라고 그 여정에 공동체가 함께 하고자 합니다. 


    1. 피신청인에게

      1. 공동체 구성원의 고통 호소에 대해 다른 대안 없이 무응답으로 일관한 피신청인의 선택이 더 큰 고통을 초래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2. 노리미트 사건 A씨의 고통에 연대하고 싶었다고 했을 때의 연민의 마음을 신청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신청인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방식을 떠올려주었으면 합니다. 만약 빈고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신청인이 호소하는 고통에 응답하기 위한 어떤 다른 계획을 갖고 있는지 설명해주기를 요청합니다. 

      3. 신청인이 빈고 공동체에 안전하게 복귀하고 활동해나가는 데 협조할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협조할 것인지 계획을 밝혀주면 고맙겠습니다.

    1. 빈고 운영위 및 빈고 공동체에

      1. 본인이 가해자로 지목된 상황을 둘러싼 자신의 입장을 빈고 공동체에 공유해달라는 신청인의 요청이 있었지만, 이에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함으로써 가중된 신청인의 고통에 운영위 또한 책임이 있습니다. 신청인의 입장에서 신청인이 이해받고자 하는 바가 빈고 공동체에 회람되고 이를 통해 신청인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주십시오. 그리고 신청인이 빈고 공동체로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는 공동체 차원의 실질적, 가시적 계획과 방안을 수립해주십시오.

      2. 이런 사건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주십시오. 구성원 간 갈등 혹은 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처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구와 해결 절차 마련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적 해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기대와 지향을 확인하고 합의도를 높여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조합원 교육 등의 방안을 떠올리고 구체화하는 작업의 필요성 확인 및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작업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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